조성 원광대 소방행정학과 교수

▲ 클립아트코리아▲ 클립아트코리아

“덕분에 용기를 얻어 조금의 결실을 거두었습니다. 화마가 스쳐 간 농장에서 수확한 과일을 조금 보내 드리오니 맛있게 드세요.”

며칠 전 신문에서 읽은 기사에 소개된 손편지 내용이다. 지난해 대형 산불로 집과 과수원을 모두 잃었던 경북 청송군 진보면의 한 이재민이 직접 재배한 사과를 정성스레 포장해 충남 태안군 자원봉사센터에 부치면서 함께 보낸 편지였다. 화마를 딛고 다시 일군 결실을 ‘조금’이라며 소박하게 건네는 이 마음이 가슴에 남아 한동안 뭉클했다.

태안군 자원봉사자 22명은 지난해 4월 산불 직후 청송 현장에 달려가 ‘사랑의 밥차’를 운영했다. 새벽 4시부터 일어나 매 끼니 300인분의 식사를 준비했고, 사흘간 현장을 지켰다. 이들의 헌신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한 달 뒤 어버이날, 다시 청송을 찾아가 피해 주민들에게 따뜻한 밥 한 끼를 대접했다. 일회성 봉사가 아니라 지속적인 관계 맺기였던 셈이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생긴다. 왜 하필 태안 사람들이었을까? 충남 서해안의 태안과 경북 내륙 산간의 청송은 지리적으로도, 생활권으로도 접점이 거의 없는 지역이다. 그 답은 17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2007년 12월 7일, 태안 앞바다에서 허베이 스피리트호 기름 유출 사고가 발생했다. 유조선에서 쏟아진 1만 2천 킬로리터의 원유는 태안 해안을 검은 기름으로 뒤덮었다. 어민들의 삶의 터전이 하루아침에 무너졌다. 그때 전국에서 123만 명의 자원봉사자가 태안으로 달려와 한겨울 차가운 바닷바람을 맞으며 맨손으로 기름을 닦아냈다. 그 손길 덕분에 태안은 다시 일어설 수 있었다.

17년이 흘렀다. 기름 덮인 바다는 이제 아득한 기억이 됐지만, 그때 받았던 온정만큼은 가슴에 남아 있었던 걸까. 태안 주민들이 산불로 고통받는 청송을 향해 달려간 것이다. 받았던 도움을 기억하고, 어려움에 처한 다른 이웃에게 되돌려주는 것, 직접 도움을 받은 사람에게 갚는 것이 아니라 도움이 필요한 또 다른 공동체에게 전달하는 ‘일반화된 호혜성’이 작동한 것이다. 재난을 통해 형성된 연대가 세월을 건너 다른 재난 현장으로 이어진 것이다.

재난관리학에서는 이러한 현상을 ‘공동체 레질리언스(Community Resilience)’ 또는 ‘지역사회 레질리언스’라는 개념으로 설명한다. 레질리언스란 단순히 재난 이전 상태로 돌아가는 ‘회복’을 의미하지 않는다. 재난을 겪으면서 오히려 더 강해지고, 그 경험이 사회적 자산으로 축적되어 다른 공동체를 돕는 역량으로 전환되는 역동적 과정을 뜻한다. 태안-청송 사례는 이 개념이 현실에서 어떻게 구현되는지를 보여주는 살아있는 사례다.

더욱 주목할 점은 청송 이재민의 반응이다. 집도, 과수원도, 농기계도 모두 잃은 상황에서 그분은 다시 사과나무를 돌보고, 수확한 사과를 태안에 보냈다. 이 행위가 갖는 의미는 단순한 감사 표현을 넘어선다. 연구에 따르면, 피해자가 도움을 받기만 하는 수동적 위치에 머무르지 않고 무언가를 되돌려줄 수 있을 때 심리적 회복이 촉진된다고 한다. 감사를 표현하는 행위 자체가 자존감을 회복시키고, 삶의 의미를 재구성하는 데 기여하기 때문이다. 청송 이재민이 보낸 사과 한 상자는 그분의 회복이 시작됐음을 알리는 신호이기도 하다.

우리의 재난관리 시스템은 그동안 ‘얼마나 빨리 대응하느냐’, ‘얼마나 효율적으로 복구하느냐’에 초점을 맞춰왔다. 골든타임 내 구조, 신속한 이재민 구호, 효율적인 복구 지원. 물론 이 모든 것이 중요하다. 그러나 이번 사례는 우리에게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재난관리에서 ‘관계’와 ‘기억’의 가치를 충분히 인식하고 있는가?

매뉴얼과 시스템만으로는 채울 수 없는 영역이 분명히 존재한다. 새벽 4시에 일어나 밥을 짓는 손길, 어버이날에 다시 찾아오는 발걸음, 그리고 그 은혜를 가슴에 새기며 사과를 포장하는 마음. 이러한 인간적 연대와 정서적 유대야말로 지역사회가 재난을 이겨내고 더 강해지는 진정한 힘의 원천이다.

공동체 레질리언스는 하루아침에 만들어지지 않는다. 재난의 아픔을 함께 나누고, 서로 돕고, 그 기억을 오래 간직할 때 비로소 형성된다. 그렇게 쌓인 사회적 자본은 다음 재난이 닥쳤을 때 지역사회를 지탱하는 보이지 않는 안전망이 된다. 정부의 지원금이나 복구 장비보다 때로는 따뜻한 밥 한 끼와 위로의 말 한마디가 더 큰 힘이 되는 이유다.

▲ 조성 원광대 교수.▲ 조성 원광대 교수.

17년 전 태안에 뿌려진 선의의 씨앗이 청송에서 꽃을 피웠고, 이제 청송의 사과가 다시 태안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누군가는 또 다른 재난 현장에 밥차를 끌고 달려갈 것이다. 재난은 불행한 일이지만, 재난이 남긴 연대의 기억은 우리 사회의 소중한 자산이 된다. 사과 한 상자에 담긴 이 진리가 더 많은 곳에서 꽃피우기를 바란다.

 중부매일